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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일본의 추락

명성황후 시해 "왕비를 죽였다"…日 외교관 추정 편지 발견/왕비 시해…생각보다 간단했다" (일본침몰 8탄)

1895년 10월 8일 일본의 자객에 의해 조선의 국모가 시해되었습니다.- 이 말은 그동안 일본에서 주장했던 내용 입니다.

대한민국과 가장 가깝게  위치한 일본이란 나라는 , 정말 용서가 되지 않는 나라입니다.

 

 

1. 임진왜란(1592~1598)으로 조선은 경복궁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고, 인구는 최소 100만 명 이상 감소했으며 (당시 조선 인구는 천만~천사백만 추정), 경작지의 2/3 이상이 황폐화되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2. 을미사변 (1895.10.8)을 일으켜 인간으로 상상하기 힘든 조선의 국모를 시해하였습니다.

3. 한일병합조약(1910.8.29)으로 일제 강점기 시작.

4. 일본 후쿠시마 지진 (2011.3.11) 한국 성금 모금액 약 1,000억 을 지원하였으나, 일본 미디어에서는 한국 지원금액을 

빼고 발표해 , 일본 국민들 중 거의가 이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5. 2019.7월 일본 한국 수출규제 시행

6. 독도가 자기 내 땅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우익 정치권으로 인하여 임진왜란부터 현재까지 한국가로써 다른 국가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일본은 

대한민국에게 자행하고 있는 중이다.  인간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지금의 한국은 일본이 세계 최고였던 가전, 반도체, 조선, 철강 등 현재 자동차만을 제외한 모든 산업분야에서 일본을 

앞지르고 있습니다. 자동차도 전기와 수소시대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이것도 앞지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시는 경술국치와 같은 일을 당하면 안 됩니다. 앞으로는 그럴 일은 1도 없습니다만, 한나라의 국모를 시해하는 

인간말종 보다도 못한 일을 일본은 저질렀습니다.

명성황후의 시해가 일본 정부의 소행이었다는 것이 명백히 밝혀졌습니다.

 

11월 16일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 '실행 그룹' 중 한 명인 일본의 외교관이 시해 다음날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나왔습니다. 
편지에는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는 내용이 실렸습니다.

 

발견된 서신은 당시 조선에 영사 관보(補)로 머물던 호리구치 구마 이치(堀口九万一·1865∼1945)가 발송인인으로 된

편지입니다.
 
발견된 편지는 총 8통으로 ,  자신의 고향 니이가타(新潟) 현 나카도리 무라(中通村)에 살았던 친한 친구이자 한(漢) 학자인 다케이시 데쇼(武石貞松) 앞으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특히 명성황후 시해 다음 날인 1895년 10월 9일 자인 6번째 편지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실렸습니다.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 "(궁) 진입은 내 담당 임무였다. 담을 넘어 (중략) 겨우 오쿠고텐(奧御殿)에 도달해 왕비를 시해했다"라고 명기됐습니다.
 
또한 "생각 외로 쉬웠다. 오히려 놀랍다"라고 감상까지 적어놓았습니다.
 
편지는 현재 나고야(名古屋) 시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계 미국인 우표·인지 연구가 스티브 하세가와(長谷川·77)가 고물 시장에서 발견했습니다.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을 쓴 재일 역사학자 김문자가 편지의 흘려 쓴 붓글씨를 판독했습니다.
 
신문은 편지가 원래 보관돼 있었다고 여겨지는 장소, 기록된 내용, 소인, 봉인 편지 작성 방법 등을 고려했을 때 호리구치의 친필로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김문자는 "사건의 세부(상세한 내용), 가족에 대한 기술 등을 보더라도 본인의 진필임이 틀림없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현역 외교관이 왕비 시해에 직접 관여했다고 알리는 문면에 새삼 생생한 놀라움을 느낀다"며 "아직까지도 불분명한 점이 많은 사건의 세부를 밝히는 열쇠가 될 가치가 높은 자료"라고 평가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1895년 10월 8일 일본 군인과 외교관, 민간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석유를 뿌려 불태운 사건입니다.
 
불평등 조약이었던 강화도조약(조일 수호 조규) 아래 명성황후 시해 실행 그룹의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재판권은 미치지 못했습니다. 
사건 다음 해인 1896년 1월 실행그룹 중 육군 장교 8명은 군법회의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편지를 쓴 것으로 추정되는 호리구치와 미우라 고로(三浦梧?) 등 48명도 히로시마(?島) 지방재판소 예심에서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소송이 중지돼 석방됐습니다.

 

위의 포스팅 내용은 11월 16일 자 일본 아사히 신문의 내용의 기사 일부를 발취한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본인들이 잘못한 것들, 불리한 것들은 모두 다 빼고 역사를 가르칩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한국의 문화에 푹 빠져 살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일본 초등학생들은 자신들의 일본 이름표에 , 한국어로 이름표를 만들어 붙이는 것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젊은 층은 거의 간단한 한국말을 구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영어처럼 모르면 안 되는 것처럼이요.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일본의 이번 총선을 보면 자민당이 또다시 과반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한국과의 관계가 개선될 수 없는 조건이 다시 성립되었습니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가야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전 세계의 문화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2021년 12월 일본에 큰 지진이 예상됩니다.

또다시 일본은 침몰할 겁니다.